질문이 바뀌었다
한동안 특허 세계가 붙들고 있던 질문은 하나였다. "AI도 발명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이 질문은 이제 사실상 닫혔다.
미국 특허청(USPTO)은 2025년 말 개정 지침에서 'AI는 발명자로 기재될 수 없다'는 원칙을 다시 못 박았다. 지식재산처(옛 특허청)도 'AI 시대 올바른 특허출원 안내서'를 내며 같은 방향으로 선을 그었다. "인간이 창작 과정에 실질적으로 기여하지 않았다면 특허를 받을 수 없다"는 것, 즉 '인간 기여' 원칙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발명자란에는 오직 사람, 자연인의 이름만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결론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다. AI가 아이디어의 상당 부분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특허의 자격 요건이 '사람의 기여'라면 —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람의 기여인가. 이 경계가 흐릿하면 원칙은 멋진 선언으로만 남고, 실제 현장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래서 AI 발명과 인간 기여의 문제는 무게중심이 옮겨왔다. 이제 다툼은 '누가 발명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했을 때 발명자냐'다.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흔히 오해하는 지점이 있다. 사람이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AI가 해법을 뱉어냈다면, 그 프롬프트를 쓴 사람이 발명자일까? 특허청들이 그리는 선은 그렇게 너그럽지 않다. 실제로 미국 특허청은 AI 시스템이 발명 과정에 쓰였는지와 무관하게 발명자 판단 기준은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밝힌다.
핵심 개념은 '착상(conception)'이다. 어려운 말 같지만 뜻은 단순하다. 특허법에서 발명의 본질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바로 그 순간에 있다. 완성된 발명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또렷하게 마음속에 확정하는 것, 그것이 착상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구분이 생긴다.
- 막연한 문제 제기는 기여로 인정받기 어렵다. 미국 특허청 지침도 '단지 문제를 인식하거나 일반적 목표를 세운 것만으로는 실질적 기여가 아니다'라고 못 박는다. "더 효율적인 배터리 소재를 찾아줘" 같은 넓은 요구는, 그 요구 자체가 발명이 아니다. AI가 알아서 후보를 뒤져 답을 냈다면, 착상은 AI 쪽에서 일어난 셈이 된다.
-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개입은 기여로 인정된다. 특정한 문제를 특정한 방식으로 좁혀 설정하고, AI가 내놓은 결과 중 무엇이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판단하고 골라내고 검증하며, 그 해법을 완성 가능한 형태로 다듬은 사람이 있다면 — 발명을 완성한 것은 그 사람의 손길이다. 지침이 말하는 '산출물의 의미를 알아보고 선별하며 그 가치를 인정하는' 행위가 바로 이 지점이다.
다시 말해 발명자란 발명을 착상하고 완성한 사람이다. 단순히 버튼을 누른 것만으로는 발명자가 되지 않는다. AI를 도구로 '썼다'는 것과 발명에 '기여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이야기다.
사람의 기여를 가르는 세 가지 축
실무에서 '실질적 기여'가 있었는지 따질 때는, 크게 세 갈래로 나눠 보면 이해가 쉽다.
1) 문제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정의했는가
막연한 목표를 던진 게 아니라, 풀어야 할 기술 과제를 특정한 제약과 조건 아래로 좁혀 설계했는가를 본다. 문제를 정교하게 짜는 일 자체가 발명적 통찰인 경우가 많다. 좋은 질문을 세우는 순간, 답의 절반은 이미 정해지기 때문이다.
2) AI의 산출물을 어떻게 다뤘는가
수많은 출력 가운데 '이게 답이다'라고 알아보는 안목, 왜 그것이 작동하는지 이해하고 확인하는 능력, 실패한 결과를 걸러내는 판단 — 이 선별과 검증의 과정에 발명자의 지분이 크게 쌓인다. AI가 100개를 뱉어내도, 그중 진짜 유효한 하나를 짚어내 완성한 것은 사람이다.
3) 결과를 완성 가능한 형태로 구현했는가
"이런 방향"이라는 개념 수준을 넘어, 실제로 재현하고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로까지 발전시켰는가를 본다. 착상과 실행 사이의 간극을 메운 사람이 발명을 '완성'한 것이다.
이 세 축을 관통하는 원칙은 하나다.
왜 이 경계가 중요한가 — 실무의 위험
이 구분이 그저 추상적인 법 이론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잘못 다루면 특허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첫째, 발명자를 잘못 적는 위험이다. 실제로 기여하지 않은 사람을 발명자로 올리거나, AI가 한 일을 사람이 한 것처럼 포장하면, 나중에 특허의 유효성이 통째로 흔들릴 수 있다. 발명자 기재는 특허의 뿌리라서, 여기가 부정확하면 등록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실제로 지식재산처는 AI에 일반적인 지시어만 입력해 생성된 내용을 그대로 명세서에 옮겨 출원하면 등록이 거절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둘째, 기록의 부재다. '누가, 무엇을, 언제 기여했는지'를 남겨두지 않으면, 막상 분쟁이 벌어졌을 때 사람의 기여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 심사관은 연구개발 노트나 발명자 확인서처럼 인간의 창작 기여를 입증할 자료를 요구할 수 있다. AI와 함께 일하는 게 일상이 될수록 개발 과정의 로그, 의사결정 기록, 왜 그 답을 골랐는지의 근거를 남기는 습관이 곧 방어 자산이 된다.
셋째, 회색지대의 확대다. AI가 착상의 대부분을 맡았지만 사람의 검증과 완성이 분명히 있었던 경우 — 그 기여가 '실질적'인지 아닌지는 사안마다 달라진다. 이 회색지대는 앞으로 판례와 심사 실무가 쌓이며 조금씩 선명해지겠지만, 당분간은 신중한 자기 점검이 가장 확실한 대응이다.
결국 '사람의 기여'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동한다
한 발 물러서서 보면, 이 원칙이 하는 말은 뜻밖에도 낙관적이다. AI가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단계를 대거 떠맡아도, 특허 제도는 여전히 사람에게 남는 몫이 있다고 못 박고 있다. 그 몫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뿐이다.
예전의 발명은 '무에서 유를 떠올리는' 착상에 방점이 있었다. 그런데 AI 시대의 인간 기여는 점점 다른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간다. 좋은 문제를 설계하고, 쏟아지는 답 중에서 진짜를 알아보고, 그것을 작동하는 현실로 완성하는 판단력이다. 생성은 값싸지고, 판별과 완성은 귀해진다.
그러니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AI가 이걸 대신 해줄까"가 아니다. "이 발명에서 내가 실질적으로 판단하고 완성한 것은 무엇인가"다. 그 답을 또렷이 말할 수 있고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면, AI가 아무리 많은 아이디어를 내놓아도 특허는 여전히 당신의 것이다. 그것이 특허청들이 '인간 기여' 원칙으로 지키려는,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경계다.
출처 · 참고
참고 문헌
- 전자신문 (2025). 미국 특허청 'AI는 발명자로 기재될 수 없다' 지침 발표. https://www.etnews.com/20251210000125
- USPTO (2025). Revised Inventorship Guidance for AI-Assisted Inventions (Federal Register). https://www.federalregister.gov/documents/2025/11/28/2025-21457/revised-inventorship-guidance-for-ai-assisted-inventions
- MS투데이 (2025). 'AI가 썼다고 다 특허는 아니다'…지재처, '인간 기여' 원칙 못 박았다. https://www.m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791
- USPTO (2024). Inventorship Guidance for AI-Assisted Inventions. https://www.uspto.gov/sites/default/files/documents/inventorship-guidance-for-ai-assisted-inventions.pdf
- 미국 연방순회항소법원 (2022). Thaler v. Vidal, 43 F.4th 1207 (Fed. Cir.). https://www.sternekessler.com/news-insights/insights/thaler-v-vidal-43-f4th-1207-fed-cir-2022-moore-taranto-st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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