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관공이 명단 맨 위에 있다는 사실
새벽 세 시, 보일러가 멈춘 집을 상상해 보자. 어디선가 물이 새는데, 벽 뒤가 보이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들어 챗봇에게 물으면, 원인 후보 열 가지를 단 1초 만에 정리해 준다. 그런데 그 열 가지 중에서 무엇이 진짜 원인인지 확인하려면, 결국 누군가는 몸을 굽혀 벽을 열어봐야 한다.

wikileaks-kr의 [인공지능 줌인] 기사는 'AI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는' 직업 세 가지로 배관공 같은 숙련 기술직, 간호 같은 돌봄 직종, 그리고 위기 관리 전문가를 꼽았다. 그림도 그리고, 코드도 짜고, 계약서 초안까지 뽑아내는 기계 앞에서, 하필 배관공 같은 손기술 직종이 그 명단에 올라 있다는 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이 목록을 그냥 '아직 로봇 손이 서툰 일들의 모음'으로 읽으면, 절반만 본 것이다. 손재주가 기준이었다면, 정교한 외과 봉합이나 반도체 조립이 먼저 올라와야 맞다. 그런데 이 명단이 실제로 재고 있던 건, 손끝의 정밀도가 아니었다.
손끝이 아니라, 책임이 현장에 있다
같은 '누수'라도 집집마다 다르다. 30년 된 빌라의 배관과 갓 지은 아파트의 배관은 늙는 방식부터 다르다. 벽 뒤의 실제 상황이 어떤지는, 열어보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다. 정해진 정답표가 없는 일, 매번 처음 보는 조건 위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 바로 이 지점을 인포굿맨의 보고서 분석은 이렇게 짚는다.
현장 판단력, 사람과의 소통 능력이 중요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반복 업무는 AI가 맡고, 사람은 더 복합적인 판단과 조율을 담당하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 AI로 사라질 직업과 살아남을 직업, Anthropic 보고서 분석 (인포굿맨, 2026)
여기에 간호사를 겹쳐 보면, 축이 한결 또렷해진다. 환자가 호소하는 통증이 진짜 위급 신호인지, 아니면 불안에서 온 과장인지. 이 판단은 데이터 패턴만으로는 딱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판단이 틀렸을 때 — 처방이 잘못되고 환자가 상했을 때 — 책임을 지는 건 알고리즘이 아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존엄성과 감정에 기반한 판단을 수행할 수 없으며, 책임을 지는 주체가 될 수 없다.
— [인공지능 줌인] "AI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대체불가 생존직업 3가지 (wikileaks-kr, 2026)
'똑똑한 일일수록 안전하다'는 착각
우리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을 떠올릴 때, 머릿속에 먼저 그려지는 건 대개 정반대 쪽이다. 어려운 자격시험을 통과한 전문직, 복잡한 분석을 다루는 지식노동. 그러니 공부 잘해서 화이트칼라가 되면 안전하다는 오랜 통념이 있다. 부모의 조언도, 진로 상담도 오래도록 이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그런데 데이터는 이 통념과 어긋난다. 앤스로픽이 2025년 2월에 발표한 경제지수(Economic Index) 첫 보고서를 보면, AI 사용은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글쓰기처럼 화면 앞에서 하는 업무에 몰려 있었다 — 컴퓨터·수학 계열 업무가 전체 대화의 37.2%로 가장 큰 몫이었다. 다시 말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AI가 파고든 영역은 몸을 쓰는 현장직이 아니라, 책상 위 지식노동 쪽이었다. '똑똑한 일일수록 안전하다'는 문장은 오히려 뒤집혀 있는 셈이다. 화면 안에서 완결되는 일일수록 먼저 노출되는 것이다.



같은 보고서에서, AI 사용의 다수는 사람을 통째로 대체하는 자동화(43%)보다 사람의 작업을 거드는 증강(57%) 쪽에 가까웠다. 반복은 기계가 가져가고, 판단과 조율은 사람에게 남는 그림이다. 그리고 이건 배관공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과 상당 부분 겹치는 구조다. 진단 후보를 뽑아내는 건 기계, 벽을 열어 책임지고 결정하는 건 사람.
오늘, 당신 책상 위에서
그러니 이 명단은 '기능직으로 전향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일 안에서 두 종류의 시간을 갈라내라는 신호에 가깝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다. 자기 업무를 두 칸으로 나눠 적어보는 것이다. 왼쪽 칸에는 판단이 틀렸을 때 내가 책임지는 일을 적는다. 오른쪽 칸에는 틀려도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 반복 처리를 적는다. 정해진 양식대로 보고서를 취합하는 일, 서식을 채워 넣는 일, 검색해서 옮겨 적는 일은 대개 오른쪽으로 간다.
만약 오른쪽 칸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그 자리는 앤스로픽 경제지수가 가리킨 '가장 먼저 노출되는 영역'과 겹친다. 반대로 왼쪽 칸이 두꺼울수록 — 현장 조건을 읽고, 사람 사이를 조율하고, 결과를 몸으로 감당하는 판단이 많을수록 — 그 일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의 조건에 가까워진다. 위치를 정하는 건 직업 이름이 아니라, 그 일의 구성 비율이다.
다시, 새벽 세 시의 배관공
물은 여전히 새고 있고, 챗봇은 여전히 후보 열 가지를 가지런히 정리해 준다. 달라지는 건 마지막 한 걸음뿐이다. 누군가 벽을 열고, 이 집의 이 배관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아침에 물이 멎어 있지 않으면 다시 전화를 받는다.
배관공이 이 명단에 오른 이유는, 그가 특별히 손이 빨라서가 아니다. 그 마지막 한 걸음에 '책임'이라는 무게가 실려 있고, 기계는 그 무게를 들 수 없어서다. 당신 일에도 그 한 걸음이 있는가. 없다면, 그 자리를 만들어야 할 사람은 AI가 아니라 당신이다.
출처 · 참고
참고 문헌
- 인포굿맨 (2026). AI로 사라질 직업과 살아남을 직업, Anthropic 보고서 분석. https://www.infogoodman.com/2026/05/ai-jobs-at-risk-anthropic-labor-market-report.html
- wikileaks-kr (2026). [인공지능 줌인] "AI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대체불가 생존직업 3가지. http://www.wikileaks-kr.org/news/articleView.html?idxno=186300
- Anthropic (2025). Introducing the Anthropic Economic Index. https://www.anthropic.com/news/the-anthropic-economic-index
이미지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