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분이면 끝나던 면접이 반나절로 늘었다. SK하이닉스가 2026년 하반기 신입 채용을 뜯어고쳤는데,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건 '자기소개서 폐지'였다. 하지만 진짜 사건은 다른 데 있다. 자기소개서를 지운 그 빈자리에 무엇을 놓았느냐다. 회사는 지원자를 반나절 동안 붙잡아 두기로 했다. 그리고 AI를 직접 써서 반도체 직무 과제를 풀어 보라는 주문을 내밀었다.
이 장면을 보통 이렇게 읽는다. 'AI가 자소서를 대신 써 주니까, 회사가 자소서를 포기했다.'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자소서를 없앤 회사가 바로 다음에 한 일이 이 해석을 뒤집는다. AI를 막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AI를 쓰는 자리를 시험장 한복판에 깔아 놓았다.
자기소개서는 원래 무엇을 재던 도구였나
채용에서 자기소개서는 한 번도 그 자체가 목적인 적이 없었다. 회사가 정말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이 사람은 낯선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생각할까'다. 자기소개서는 그걸 짧은 글로 엿보려던 대리 지표(proxy)였을 뿐이다. 그런데 대리 지표에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 하나 있다. 무엇을 재는지가 알려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 지표에만 맞춰 자신을 다듬기 시작한다. 첨삭 학원이 그렇게 생겼다. '성장 과정—지원 동기—입사 후 포부'로 이어지는 판박이 템플릿도 그렇게 굳어졌다.
생성형 AI는 이 최적화를 한순간에, 그것도 공짜로 무한정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자기소개서는 이제 엉뚱한 것을 재고 있다. 지원자의 사고가 아니라, 지원자가 프롬프트에 넣은 AI 모델의 문장력을 잰다. 재려던 것과 실제로 재고 있는 것이 이렇게 어긋나면, 그 도구는 고장 난 것이다.
여기서 길이 갈린다. 고장 난 시험지를 앞에 두고 회사가 고를 수 있는 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AI를 감시하고 금지해서 '순수한 지원자'를 되살리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시험 문제 자체를, AI가 대신 못 푸는 것으로 바꿔 끼우는 길이다. 이번 SK하이닉스 AI 채용 개편은 두 번째 길을 택했다.
AI를 부정행위에서 평가 항목으로 승격시키다
새 지원 서식을 보면 이게 분명해진다. '자기소개' 칸을 지운 자리에, 이제 'AI 활용 역량'과 '반도체 직무 전문성'을 적게 한다. 면접도 달라졌다. 20~30분짜리 짧은 인터뷰 대신, 반나절 동안 과제 수행과 심층 인터뷰를 함께 진행하며 직무 전문성과 AI 응용 능력, 인문학적 소양, 논리적 사고력을 종합적으로 검증한다. 여기에 더해 4분기에는 반도체 현장의 문제를 AI로 해결하는 'AI 해커톤 공모전'을 따로 열어, 우수 참가자에게는 서류 전형을 면제하고 곧장 면접 기회를 주는 패스트트랙을 붙였다. 학력과 연령 제한도 이참에 함께 없앴다.
AI 시대에는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인간과 AI가 공존하는 새로운 시스템과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 인재가 더 중요해질 것.
— SK하이닉스 뉴스룸, 「"스펙 보다 '생각 근육' 본다"… AI 시대 맞춤형 인재 선발」, 2026
최태원 회장은 이 회사가 지원자에게서 보려는 것을 '생각 근육'이라고 불렀다. 문제의 본질을 스스로 질문하고 끝까지 사고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말은 추상적이지만, 채용 설계로 옮겨 놓으면 뜻밖에 구체적이다. AI에게 초안을 시키는 능력은 이제 사람을 가려내지 못한다. 다들 하기 때문이다. 진짜 차이는 다른 데서 난다. AI가 내놓은 답이 어디서 틀렸는지 알아채고, 그걸 뒤집는 지점에서 갈린다. 반나절이라는 시간은 바로 그 지점을 지켜보기 위한 최소한의 러닝타임이다. 20분으로는 완성된 답만 받아 볼 수 있다. 반나절이면 지원자가 AI를 붙잡고 씨름하는 과정까지 보인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이 회사는 AI 사용을 부정행위 목록에서 지웠다. 그리고 평가 항목으로 옮겨 적었다. 시험 감독이 하는 일과 정반대다.
그런데 정말 AI를 켜 두는 게 맞나
그런데 정말 AI를 켜 둔 채 시험을 보는 게 맞을까. 반대편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쪽이 있다. 적지 않은 IT 기업이 코딩테스트에서 AI 사용을 금지하고 지원자의 화면을 감시한다. 공기업과 공무원 채용은 여전히 AI가 끼어들 수 없는 필기시험을 선발의 축으로 삼는다. 일부 대학은 챗봇 대필을 막으려고 손글씨 대면시험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의 논리는 단순하지만 힘이 세다. AI가 끼면 누가 진짜 실력자인지 흐려지고, 흐려진 신호로는 사람을 공정하게 줄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서 있는 전제가 다르다. 필기시험은 '이 사람이 혼자서 무엇을 아는가'를 재려 한다. 반나절 챌린지는 '이 사람이 도구를 끼고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를 재려 한다. 만약 입사한 뒤의 실제 업무가 AI를 끼고 돌아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AI를 뺀 상태를 정밀하게 잴수록, 그 측정치는 오히려 현업에서 멀어진다. 공정한 신호와 유효한 신호는 서로 다른 문제다. 감시하는 쪽은 공정을 택했고, SK하이닉스는 유효를 택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그 선택의 대가를 치른다.
왜 하필 '신입'에게 AI를 묻나
한 가지가 계속 걸린다. 왜 하필 경력직이 아니라 신입에게 AI 역량을 묻는가. 여기서 사다리 하나가 사라진 게 보인다. 예전의 신입은 회의록 정리, 1차 자료 조사, 초안 작성 같은 허드렛일을 하며 판단력을 키웠다. 그런데 그 일들이 지금은 통째로 AI의 몫이 됐다. 실제로 스탠퍼드의 브린욜프슨 연구진은 2022년 말 이후 AI 노출이 큰 직군에서 초기 경력자 고용이 또래 저노출 직군보다 뒤처졌고, 소프트웨어 개발 신입 일자리가 약 20% 줄었고, 고객상담 쪽 신입 채용도 함께 뒷걸음쳤다고 짚었다. 신입이 경험을 쌓아 올리던 계단이 빠르게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계단이 사라지면 회사의 요구도 바뀐다. 밑바닥부터 배워 올라올 시간을 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는 처음부터 AI가 못 하는 층위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 무엇을 물을지 정하고, AI의 답을 의심하고, 여러 영역을 엮어 다시 설계하는 일 말이다. 신입에게 AI 활용을 묻는 건 일을 빨리 시키려는 속셈이 아니다. AI가 이미 가져가 버린 초급 업무, 그 위에서 곧장 판단을 시작할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다시, 반나절이라는 숫자
SK하이닉스 AI 채용이 던진 질문은 'AI를 쓸 줄 아느냐'가 아니다. 그건 이제 기본기다. 진짜 질문은 따로 있다. 'AI가 틀렸을 때, 그걸 알아챌 수 있느냐'다. 20분이면 완성된 답만 제출받고 끝난다. 반나절이면, 답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 순간 지원자의 표정이 바뀌는 그 장면까지 지켜볼 수 있다. 회사가 늘린 것은 면접 시간이 아니었다. 사람이 AI를 의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들여다볼 창(窓)이었다.
출처 · 참고
참고 문헌
- SK하이닉스 뉴스룸 (2026). 「"스펙 보다 '생각 근육' 본다"… AI 시대 맞춤형 인재 선발」. https://news.skhynix.co.kr/ai-talent-recruit-2026-02/
- 뉴스1 (2026). 「"자소서 없애고 '반나절' 심층면접"…SK하이닉스, 채용 확 바꾼다」. https://www.news1.kr/industry/general-industry/6243505
- 디지털데일리 (2026). 「SK하이닉스, 채용 전형 전면 개편…'반나절 심층면접'으로 AI 인재 발굴」. https://www.ddaily.co.kr/page/view/2026073008421596124
- Erik Brynjolfsson, Bharat Chandar & Ruyu Chen (2025). Canaries in the Coal Mine? Six Facts about the Recent Employment Effects of Artificial Intelligence. https://digitaleconomy.stanford.edu/publication/canaries-in-the-coal-mine-six-facts-about-the-recent-employment-effects-of-artificial-intelligence/
- 디지털투데이 (2026). 「챗GPT 등장 여파로 대학가 '흔들'…강의·과제 사라지는 이유」. https://www.digita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6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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