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가장 앞서 쓰는 대학이, AI 금지 구간부터 그렸다
KAIST가 전 교과목을 뜯어고치겠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의 예상은 한쪽으로 쏠렸다. 강의마다 챗봇을 붙이고, 과제를 프롬프트 짜기로 바꾸고, 캠퍼스 전체를 AI로 채우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막상 공개된 설계도의 맨 앞 칸은 정반대였다. 1단계에 놓인 것은 AI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 고유의 사고와 기초역량을 기르는 교육이었다.
AI 활용 수준에 따라 교육과정을 3단계로 구분해 AI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 고유의 사고와 기초역량을 기르는 교육부터 AI를 활용하는 교육, AI를 직접 설계하고 주도하는 교육까지 단계적으로 연결할 방침
— 이뉴스투데이, 「KAIST, 'AI 네이티브 캠퍼스' 전환···전 교과목 AI 활용체계 재설계」 (2026)
가장 앞서가겠다는 대학이, 왜 'AI를 쓰지 마라'는 수업을 커리큘럼의 출발점으로 삼았을까. 이 질문을 붙들고 보면, 3단계 구분이 갑자기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다.
이건 메뉴판이 아니라 계단이다
만약 이 세 단계가 골라 담는 메뉴판이었다면, 학교는 굳이 1단계를 만들 이유가 없다. AI를 직접 주도하는 3단계 수업만 잔뜩 열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KAIST의 구분에는 순서가 박혀 있다. AI를 쓰지 않는 교육 → 활용하는 교육 → 직접 설계하고 주도하는 교육. 말하자면 1단계는 3단계를 듣기 위한 선수과목(先修科目)인 셈이다.
왜 이 순서를 강제할까. AI를 직접 설계하고 주도한다는 건, 기계가 내놓은 답이 틀렸을 때 그것을 알아채고 되돌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판별은 또 다른 AI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자기 손으로 한 번은 끝까지 밀어붙여 본 사람만이, 남이(또는 기계가) 내놓은 결과물을 보고 '여기가 틀렸다'고 짚어낼 수 있다.
그러니 1단계의 'AI 금지'는 옛 방식을 지키려는 향수가 아니다. 오히려 3단계에서 AI를 부릴 감독자를 미리 길러내는 공정에 가깝다. 못 쓰게 막는 구간이 있어야, 나중에 잘 쓰는 사람이 나온다.
'AI 시대 필요한 역량'이라는 말이 뒤집힌다
AI 시대에 필요한 역량을 말할 때, 대부분은 프롬프트를 잘 쓰는 능력이나 최신 모델을 빨리 익히는 손놀림을 먼저 떠올린다. KAIST의 구조는 그 순서를 조용히 거꾸로 세운다. 도구를 다루는 손재주는 맨 나중 단계에 두고, 맨 앞자리에는 도구 없이도 스스로 사고하는 근력을 놓았다.
비슷한 시기에,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국가AI전략위)도 대학 교육의 방향을 같은 각도에서 짚었다.
대학 AI 교육이 교과목 확대를 넘어 모든 전공 교육 내용과 방식, 학생들이 갖춰야 할 핵심 역량을 함께 재설계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
— 지디넷코리아, 「국가AI전략위 "대학 교육, 교과목 확대 넘어 전공 전체 재설계"」 (2026)
여기서 핵심은 '핵심 역량을 함께 재설계'라는 대목이다. AI 과목을 몇 개 더 여는 일과, 무엇이 인간이 갖춰야 할 역량인지 그 정의를 다시 쓰는 일은 전혀 다른 작업이다. 그리고 KAIST가 그 재정의의 맨 밑바닥에 깔아 둔 것이, 바로 'AI 없이 판단하는 힘'이다.
반대편도 진지하다
뒤집어 보자. '처음부터 AI를 쓰면서 배워야 한다, 손대지 못하게 막는 구간은 낭비다'라는 주장도 결코 허수아비가 아니다. 칸 아카데미의 살 칸은 AI 튜터 Khanmigo를 앞세워, 학습의 이른 단계부터 AI가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해 왔다. 'AI-first' 커리큘럼을 내건 에듀테크들은 지금도 이 방향으로 제품과 학교를 실제로 굴리고 있다. 그러니 논쟁은 충분히 성립한다.
사실 이 다툼은 처음이 아니다. 계산기가 교실에 들어왔을 때도 똑같은 전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남은 교훈은 대체로 한 문장으로 정리됐다 — 암산으로 어림값을 낼 줄 아는 학생이 계산기의 오타를 잡아낸다. 실제로 라쿠르(LaCour) 연구진(2019)이 계산기 답을 15% 부풀려 내놓게 하자, 이를 알아챈 대학생은 문제에 따라 많아야 다섯 중 하나 정도에 그쳤고, 수 감각이 밴 학생일수록 그 오류를 잡아냈다. 도구가 아무리 바뀌어도, 도구 없이 정답을 가늠할 기준을 몸에 지닌 사람이 그 도구를 가장 잘 쓴다는 자리는 옮겨가지 않았다. KAIST의 1단계는 이 오래된 기준선을 AI 버전으로 다시 세운 것에 가깝다.
당신의 1단계는 어디인가
KAIST는 대학이니 커리큘럼으로 이 계단을 세웠다. 그런데 회사에도, 팀에도, 개인의 하루에도 같은 계단이 필요하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나는 내 일에서 무엇을 'AI 금지 구간'으로 남겨 둘 것인가.
기획서 초안을 늘 챗봇에 맡겨 온 사람이라면, 한 달에 한 번쯤은 백지에서 논리를 직접 세워 보는 것. 코드 리뷰를 AI 요약에만 기대 온 팀이라면, 핵심 모듈 하나만큼은 사람이 끝까지 읽는 규칙을 두는 것. 거창한 결심이 아니다. 기계의 답을 '이건 아니다'라고 되받아칠 근육을 놓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운동일 뿐이다.
AI를 가장 앞서 쓰겠다는 대학이, 첫 칸에 'AI 금지'를 적어 넣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커리큘럼에서 그 첫 칸은 지금 비어 있는가, 아니면 이미 AI가 다 채워 버렸는가.
출처 · 참고
참고 문헌
- 이뉴스투데이 (2026). KAIST, 'AI 네이티브 캠퍼스' 전환···전 교과목 AI 활용체계 재설계. 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62309
- 지디넷코리아 (2026). 국가AI전략위 "대학 교육, 교과목 확대 넘어 전공 전체 재설계". https://zdnet.co.kr/view/?no=20260610172039
- LaCour, M., Cantú, N. G., & Davis, T. (2019). When calculators lie: A demonstration of uncritical calculator usage among college students and factors that improve performance. PLoS One.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6821400/
-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2026). AI can tutor students – with a teacher's help, says Khan Academy founder. https://www.csmonitor.com/USA/Education/2026/0807/ai-schools-sal-khan-acad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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