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가 사라지는 자리에서 시작되는 질문
요즘 조직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벌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보고서 초안 쓰기, 데이터 정리, 코드 리뷰, 일정 조율, 회의록 요약 같은 이른바 '실무'가 하나둘 AI 도구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팀원 서너 명이 며칠을 매달려야 하던 일이, 이제는 프롬프트 몇 줄과 검토 한 번으로 끝납니다. 그런 장면이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이 변화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아프게 닿는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중간관리자입니다. 팀장, 파트장, 실장. 이름은 달라도 이들이 오래 맡아 온 역할은 하나였습니다. 실무와 경영 사이를 오가는 '번역기'였지요. 위에서 내려온 목표를 실무 단위로 잘게 쪼개고, 아래에서 올라온 결과물을 모아 위로 올려 보내는 일. 그런데 그 쪼개고 모으는 일의 상당 부분을 AI가 대신하기 시작하면, 질문은 딱 하나로 좁혀집니다.
'전달자'로서의 중간관리자는 실제로 위협받는다
먼저 냉정하게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중간관리자가 해 온 일의 상당 부분은, 사실 정보를 '옮기고' '가공하는'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 실무 데이터를 가져다 경영진 보고용 자료로 만드는 일
- 여러 팀원의 진행 상황을 모아 하나의 현황으로 정리하는 일
- 상급자의 지시를 실무자가 알아들을 지시로 바꿔 주는 일
이 세 가지는 공교롭게도 모두 AI가 꽤 잘하는 영역입니다. 데이터가 시스템에 차곡차곡 쌓여 있고 일의 흐름이 표준화돼 있다면, 요약과 취합은 사람보다 기계가 빠릅니다. 게다가 지치지도 않지요. 실제로 브린욜프슨과 동료들이 5천여 명의 고객상담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대규모 현장 실험(2023)에서, 생성형 AI 도우미를 붙인 팀의 시간당 처리 건수는 평균 14% 늘었습니다. 요약·취합 같은 반복 실무에서 AI가 이 정도 성과를 낸다면, 그 실무를 모아 올리던 관리자의 몫도 같은 압력을 받습니다. 그래서 '정보를 옮긴다'는 것만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던 관리자는 실제로 흔들립니다. 아마존이 2024년 9월 '직원 대 관리자 비율을 최소 15% 높이라'고 사내에 지시한 것처럼, 조직이 계층을 걷어내고 팀을 넓고 평평하게(flat) 펴는 재편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 조사기관 가트너는 2023년 전망에서, 2026년까지 조직 다섯 곳 중 한 곳이 AI를 근거로 현재 중간관리 직책의 절반 이상을 줄일 것으로 내다봤습니다(어디까지나 전망치입니다).
그러니 지금 벌어지는 중간관리자 역할 변화의 핵심은, 무엇으로 그 자리를 정당화하느냐, 그 기준이 바뀐다는 데 있습니다. 무게중심이 옮겨 가는 겁니다. 전달과 가공에서, 기계가 못 하는 판단과 관계 쪽으로. 맥킨지의 필드·핸콕·섀닝거가 『파워 투 더 미들』(2023)에서 정리했듯, 관리자의 진짜 가치는 정보를 옮기는 데가 아니라 사람을 키우고 전략과 현장을 잇는 데 있습니다.
AI가 못 하는 네 가지, 그것이 새로운 직무기술서
흥미로운 건 이겁니다. AI가 실무를 가져갈수록, 사람에게 남는 일은 오히려 더 인간적인 쪽으로 응축됩니다. 그 축은 네 가지입니다.
1. 맥락을 부여하는 사람
AI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는지는 잘 처리합니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이걸 하는가'는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똑같은 매출 보고서라도, 그게 신사업에 뛰어들라는 신호인지 아니면 발을 빼라는 근거인지는 조직의 맥락 안에서만 뜻이 생깁니다. 팀원에게 일의 이유와 우선순위를 설명하고, 숫자 뒤에 숨은 판단을 얹어 주는 일. 이건 여전히 사람의 몫입니다.
2. 판단의 책임을 지는 사람
AI가 내놓는 결과물은 언제나 '초안'입니다. 그걸 채택할지, 고객에게 보낼지, 경영진에 올릴지 결정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주체는 기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AI가 그럴듯한 답을 빠르게 쏟아낼수록, '이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무게는 더 커집니다. 최종 검증자이자 결정권자 말이지요.
3. 사람을 키우는 사람
실무를 AI가 대신하면, 신입과 주니어는 곤란해집니다. '반복하면서 배우던 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단순한 일을 수천 번 반복하며 감을 익혔는데, 그 단계가 통째로 없어진 세대에게 판단력과 안목을 어떻게 심어 줄까요. 로봇수술 수련 현장을 2년간 파고든 맷 빈의 연구(2019)가 바로 이 지점을 짚습니다. 기계가 수술을 떠맡자, 수련의가 집도의 곁에서 손으로 익히던 '학습의 사다리'부터 끊어졌다는 것이지요. 이 코칭과 육성의 역할은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더 귀해지고, 그 몫이 중간관리자에게 넘어옵니다.
4. AI를 설계하고 배치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팀 안에서 '어떤 일을 AI에 맡기고 어떤 일을 사람이 할지'를 정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관리 업무입니다. 도구를 들여오고, 프롬프트와 워크플로를 다듬고, 결과의 품질을 챙기는 일. 이제 중간관리자는 사람으로 이뤄진 팀과 'AI 팀'을 함께 이끄는 하이브리드 리더가 됩니다.
관리자가 지금 당장 바꿔야 할 세 가지 습관
방향을 안다고 해서 몸에 밴 습관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그래서 당장 현실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부터 짚어 보겠습니다.
- 내가 모으던 일을 목록으로 적어 보기. 그중 표준화하거나 자동화할 수 있는 것과, 오직 나만의 판단이 들어가야 하는 것을 나눠 봅니다. 앞엣것은 과감히 넘기고, 뒤엣것에 시간을 몰아줍니다.
- 결과물이 아니라 기준을 관리하기. 팀원이 뭘 만들었는지 하나하나 검사하는 대신, '좋은 결과란 이런 것'이라는 기준을 분명히 세우고 함께 나눕니다. AI 시대의 품질관리는 사후 검열이 아니라 사전 기준 설정에서 갈립니다.
- 1:1 대화 시간을 늘리기. 업무가 얼마나 진행됐는지는 대시보드가 알려 줍니다. 관리자가 따로 챙겨야 할 건, 데이터에 담기지 않는 것입니다. 동기, 불안, 그리고 성장의 방향에 관한 대화 말이지요.
없어지는 것은 자리가 아니라 정의다
"AI가 실무를 대신하면 중간관리자는 필요 없어진다." 이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정보를 옮기고 가공하기만 하던 관리자의 방식은 분명히 저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맥락을 부여하고, 판단에 책임지고, 사람을 키우고, 도구를 설계하는 일은 오히려 조직에서 더 귀해집니다.
실무가 기계로 넘어가는 시대에 중간관리자의 진짜 일은, 어쩌면 이제야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빨리 모으는 사람'에서 '더 좋은 방향을 정하는 사람'으로. 변화의 파도를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 파도가 한 차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무엇을 세울지, 그걸 먼저 고민하는 관리자에게 다음 자리가 열립니다.
출처 · 참고
참고 문헌
- Brynjolfsson, E., Li, D., & Raymond, L. (2023). Generative AI at Work. NBER Working Paper No. 31161 (이후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2025 게재) — 생성형 AI 도우미 도입으로 고객상담 처리량 평균 14% 증가, 신참일수록 효과가 큼. https://www.nber.org/papers/w31161
- Beane, M. (2019). Learning to Work with Intelligent Machines. Harvard Business Review, 97(5) (관련 실증연구: Shadow Learning, Administrative Science Quarterly, 2019) — 자동화가 수련자의 현장 실습·학습 경로를 잠식함. https://hbr.org/2019/09/learning-to-work-with-intelligent-machines
- Field, E., Hancock, B., & Schaninger, B. (2023). Power to the Middle: Why Managers Hold the Keys to the Future of Work. Harvard Business Review Press — 중간관리자의 가치는 전략과 현장을 잇고 사람을 키우는 데 있음. https://www.oreilly.com/library/view/power-to-the/9781647824860/
- Amazon (Andy Jassy, 2024. 9). Update on manager team ratio — S팀 조직별 '개인 기여자 대 관리자 비율'을 2025년 1분기 말까지 최소 15% 상향 지시(계층 축소). https://www.aboutamazon.com/news/company-news/ceo-andy-jassy-latest-update-on-amazon-return-to-office-manager-team-ratio
- Gartner (2023 예측) — 2026년까지 조직 5곳 중 1곳(20%)이 AI를 활용해 현재 중간관리 직책의 절반 이상을 축소할 것으로 전망. https://www.inc.com/dave-kerpen/gartner-prediction-ai-eliminate-management-roles/9136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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