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수업활동100》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 수업을 즐기는 판을 깔아주는 책이다.
— K스피릿, 《수업활동100》 소개 기사
좋은 문장이다. 그런데 한 단어에 자꾸 눈이 걸린다. 판을 깔아준다.
이 말 안에는 이미 두 사람이 나뉘어 있다. 판 위에서 웃고 떠들고 빠져드는 쪽이 있고, 그 판을 세우고 치우고 지켜보는 쪽이 있다. '함께 즐긴다'고 적혀 있지만, 문장이 짜인 방식은 여전히 세팅을 한쪽에게만 떠맡긴다. 학생 참여형 수업을 오래 해 본 교사라면 이 틈을 몸으로 안다. 활동이 끝나고 교실이 비면, 흥분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는 건 판을 깐 사람의 피로뿐이다.
판 위에서 웃는 쪽, 판을 지키는 쪽
참여형 수업이 그리는 이상은 오래전부터 또렷했다.
좋은 수업은 학생들이 수업에 흥미와 관심을 갖고, 수업의 주인이 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일어날 것이다.
— 〈학생 참여형 수업의 이해와 실천〉, brunch
이 말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함정이 하나 숨어 있다. 학생의 몰입만을 성공의 지표로 삼는 순간, 교사는 자동으로 무대 밖으로 밀려난다. 몰입은 학생 몫, 준비와 진행과 뒷정리는 교사 몫으로 갈리는 것이다. 활동지를 만들고, 모둠을 짜고, 소란을 다스리고, 감정을 쏟는 일 — 참여의 즐거움이 커질수록 그것을 떠받치는 노동도 같이 커진다. 그런데 그 노동은 통째로 한 사람의 어깨에만 쌓인다.
그래서 참여형 수업은 자주 비슷한 곡선을 그린다. 학기 초의 뜨거운 활동 설계, 중반의 피로, 후반의 '그냥 진도 나가기'로의 회귀. 우리는 흔히 이걸 교사의 열정이 식었거나 역량이 모자란 탓으로 읽는다. 그러나 소진은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설계의 결과다. 교사 자신의 즐거움과 배움을 처음부터 빼고 짠 수업은, 반쪽짜리 연료로 굴러가는 엔진이라, 학기 중반이면 대개 멈춘다.
1990년대에도 그 판은 깔렸다
이 곡선을 나라 전체 규모로 한 번 그려 본 적이 있다. 1990년대 중반의 열린교육 운동이다.
교실의 벽을 트고, 개별화된 활동 중심으로 수업을 바꾸고, 학생을 배움의 주체로 세운다 — 지금의 학생 참여형 수업과 구호가 거의 그대로 겹친다. 교육 당국이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전국의 교실이 재편됐다. 그리고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실패의 이유로는 그것을 뒷받침할 교육과정 혁신도 지원 구조도 없이 위에서 너무 빠르게 밀어붙였다는 점이 먼저 지목된다. 그리고 그 부재의 무게는 고스란히 교사의 업무 과중으로 돌아왔다. 매 시간 새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 부담, 폭증한 준비 시간, 그걸 받쳐 줄 구조의 부재.
30년의 간격을 두고 두 장면을 포개 보면, 변하지 않은 것이 드러난다. 학생이 주인이라는 이상도, 그 이상을 실현하느라 교사가 갈려 나간다는 사실도 그대로다. 판을 더 잘 까는 법은 계속 발전했다. 그런데 판을 까는 사람이 어떻게 버티느냐는, 여전히 설계 바깥에 놓여 있었다.
지금, 다시 판을 까는 사람들
같은 판이 지금 또 깔리고 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순차 적용되고 2025년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되면서, 학생 참여형 수업은 권장 사항이 아니라 사실상의 표준 요구가 됐다. 학생이 과목을 고르고, 수업의 주인이 되고, 활동으로 배운다.
그런데 같은 시기, 다른 흐름 하나가 반대편에서 밀려온다. 2023년 7월 서이초 교사의 죽음 이후, 교사 소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라는 시스템의 문제로 공론화됐다. 검은 옷을 입은 교사 수만 명이 거리로 나섰던 그해 여름의 요구를 한 줄로 줄이면 이렇다. 더 많은 것을 감당하라고만 하지 말고, 감당할 수 있는 구조를 달라.
두 흐름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한쪽은 더 풍부한 참여형 수업을 요구하고, 다른 한쪽은 그 요구를 떠받칠 교사가 이미 한계라고 말한다. 활동을 100가지 더 쥐여 준다고 풀릴 충돌이 아니다. 질문을 옮겨야 한다. '어떤 활동을 넣을까'에서 이 판에서 교사는 무엇을 얻는가로.
교사가 궁금해하지 않는 수업
다시 《수업활동100》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이 책의 진짜 장점은 활동이 100개라는 데 있지 않다. 이 책을 소개하는 기사 제목이 '교사와 학생이 모두 즐겁고 행복한'이라는 데 있다. 즐거움을 받는 사람 명단에 교사를 또렷이 끼워 넣은 것 — 그게 핵심이다.
토론 수업에서 교사가 아이들의 논변에 진짜로 놀라는 순간, 프로젝트에서 학생이 교사도 예상 못 한 자료를 들고 오는 순간 — 그때 교사는 판을 깔아 준 사람이 아니라 판 위의 참가자가 된다. 이건 낭만이 아니라 연료의 문제다. 자기도 궁금한 수업만이 다음 학기까지 교사를 버티게 한다.
여기서 익숙한 반론과 마주친다. 학생중심 교육론은 오래도록 '무대 위의 현자에서 곁의 안내자로(Alison King, 1993)'를 주문해 왔다. 교사는 물러서라, 개입을 줄여라, 무대를 비워 줘라. 학생의 주도성이 목적이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물러서라'는 처방에는 부작용이 딸려 온다. 교사를 배움의 주체에서 동선 관리자로 강등시키는 것이다. 곁의 안내자란, 판을 깔되 그 위에서 놀지는 않는 사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교사를 무대 밖으로 내보낸 참여형 수업이 반복해서 소진으로 끝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니 안내자로 물러나는 대신, 같은 판의 다른 참가자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학생이 주인이 되는 것과 교사가 참가자가 되는 것은 서로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 한 교실에 주인은 여럿일 수 있다.
한 줄 먼저
그래서 제안은 소박하다. 다음 참여형 수업을 준비할 때, 활동 목록을 펼치기 전에 종이 맨 위에 한 줄을 먼저 적어 보라. 이 시간에 내가 새로 배우거나 궁금해할 한 가지. 그 칸이 끝내 채워지지 않는 수업이라면, 그건 학생만 신나는 수업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학생만 신나는 수업은, 지난 30년이 보여 줬듯, 오래가지 못한다.
판을 깔아주는 사람은 놀지 않는다. 그러니 다음번엔 판을 깔지 말고, 그 위에 같이 앉아 보는 건 어떤가.
출처 · 참고
참고 문헌
- 김갑용 (n.d.). 학생 참여형 수업의 이해와 실천. https://brunch.co.kr/@gab2yong/18
- K스피릿 (2023). 교사와 학생이 모두 즐겁고 행복한 수업으로 이끄는 100가지 활동.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73853
- Alison King (1993). From Sage on the Stage to Guide on the Side. College Teaching, 41(1), 30–35.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87567555.1993.992678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열린교육.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7042
- 한국교육신문 (n.d.). 한국의 열린교실은 왜 실패했을까?. https://www.hangyo.com/news/article.html?no=92524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n.d.). 고교학점제. https://www.korea.kr/special/policyCurationView.do?newsId=148866513
- 머니투데이 (2025). 전 국민 들썩였지만…"학부모 탓 아냐" 종결된 서이초 교사 죽음. https://www.mt.co.kr/society/2025/07/18/2025071715461240721
이미지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