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끄러운데 아무것도 남지 않는 글

주제 하나를 챗봇 입력창에 붙여넣는다. 3초 뒤, 잘 정돈된 문단 하나가 돌아온다. 접속사는 제자리에 놓여 있고, 문장은 리듬을 타고, 오탈자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 "이 글이 하려는 말이 대체 뭐냐"를 한 문장으로 옮겨 적으라고 하면, 옮길 것이 없다.

문장이 공짜가 된 시대에 우리가 가장 먼저 마주치는 물건이 바로 이것이다. 표면은 완벽한데 안에 주장이 없는 문단이다. 오탈자를 잡는 솜씨, 문장을 다듬는 솜씨, 단락을 매끄럽게 잇는 솜씨 — 지난 20년 동안 "글 잘 쓴다"는 말이 가리키던 것들이다. 그런데 이제 그 솜씨들은 월 몇만 원짜리 구독으로 살 수 있다.

그러면 질문이 하나 남는다. 이 솜씨들이 공짜가 된 뒤에도, 글쓰기에 값이 붙는 자리는 어디에 남아 있나.

폴 그레이엄이 문장 하나에 숨겨둔 진짜 주장

폴 그레이엄이 그은 진짜 분할선은 글 쓰는 자와 못 쓰는 자라는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 생각하는 자와 생각 못 하는 자의 선이다. AI가 값을 0으로 떨어뜨린 것은 문장이며, 무엇을 말할지 정하는 이 선은 건드리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았다.
그레이엄이 진짜로 그은 선

2024년 10월, 폴 그레이엄은 「Writes and Write-Nots」라는 짧은 글에서 도발적인 예언을 내놓았다. 원래 글쓰기는 어렵다. 어려우니까 대부분은 피한다. 그런데 AI가 그 어려움을 대신 치워주면, 세상은 글 쓰는 소수와 글 쓰지 않는 다수로 쪼개진다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글 쓰는 자와 글 못 쓰는 자로 나뉠 것이다. … 그것은 생각하는 자와 생각 못 하는 자로 나뉜 세계다.

The result will be a world divided into writes and write-nots. … It will be a world of thinks and think-nots.

— Paul Graham, "Writes and Write-Nots" (2024)

사람들은 보통 앞 문장까지만 인용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그레이엄은 같은 글에 뒤 문장을 슬쩍 붙여 두었다. 그리고 이 뒤 문장이 그의 진짜 예언이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글을 쓴다는 건 곧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글쓰기를 손에서 놓는 사람은 생각하는 근육도 같이 놓는다. 글 쓰는 자와 안 쓰는 자의 분할은 표면일 뿐이고, 그 아래에는 생각하는 자와 생각하지 못하는 자의 분할이 깔려 있다.

그레이엄이 진짜로 그은 선은 문장을 뽑아내는 능력 위에 있지 않았다. 무엇을 말할지 정하는 능력 위에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AI가 값을 0으로 떨어뜨린 쪽은 앞이지 뒤가 아니다.

격차는 좁혀지는 게 아니라 더 벌어진다

AI가 문장이라는 바닥을 누구나 매끄러운 수준으로 끌어올려도 실력은 평준화되지 않는다. 남과 같은 문장에서 멈추는 사람과 그 위에 남과 다른 생각을 쌓는 사람의 격차는 오직 천장, 곧 사고의 층에서만 더 벌어진다.
격차는 천장에서만 벌어진다

여기서 흔한 반론이 나온다. AI가 누구나 매끄러운 글을 쓰게 해주니, 글쓰기 실력은 결국 평준화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실제로 수많은 AI 글쓰기 도구가 "이제 누구나 작가"라는 문구를 앞세워 팔린다. 이건 상상 속 반론이 아니라, 시장에서 돈을 걸고 실행 중인 입장이다.

곽지원은 정반대로 본다.

LLM은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어줄 수는 있어도, 인간의 '내러티브 구성 능력'과 '메타인지'까지는 대체하지 못한다.

— 곽지원, 「AI가 보편화될수록, 글쓰기 실력의 격차는 더 잔인하게 벌어집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이 글의 어디가 약한지를 스스로 아는 것이 메타인지다. 흩어진 재료를 하나의 이야기로 꿰는 것이 내러티브다. 이 둘은 프롬프트로 사올 수 없다. AI가 문장이라는 바닥을 통째로 끌어올리면, 사람을 가르는 지점은 그 위, 사고의 층으로 올라가 버린다. 바닥이 사라진 경기에서 격차는 오직 천장에서만 벌어진다.

ChatGPT는 2023년 1월, 출시 두 달 만에 월간 사용자 1억 명을 넘겼다(로이터·UBS 추정). 지금은 거의 모든 직장인의 초안이 같은 모델 몇 개에서 나온다. 초안의 품질이 다 함께 높아질수록, 남과 똑같은 문장 위에 남과 다른 무언가를 얹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 사이는 오히려 더 멀어진다.

ChatGPT는 2023년 1월 출시 두 달 만에 월간 활성 사용자 1억 명을 넘어 당시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서비스가 됐다. 거의 모든 초안이 같은 모델 몇 개에서 나오면서 문장의 품질은 다 함께 높아진다.
두 달 만에 사용자 1억 명

사고력을 눈으로 확인하는 법 — 결론을 뒤집어 보기

'사고력'은 말로만 들으면 뜬구름 같다. 손에 잡히게 해주는 테스트가 하나 있다. 글을 다 쓴 뒤, 결론 문장을 뽑아 정반대로 뒤집어 보는 것이다. 뒤집은 문장을 진지하게 주장하거나 실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원래 결론이 담은 정보량은 0이다.

"좋은 관리자는 사람을 잘 돌보는 사람이다"를 뒤집으면 "좋은 관리자는 사람을 안 돌본다"가 된다. 아무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반박조차 성립하지 않는 문장은, 맞는 말이지만 아무 말도 아니다. AI는 바로 이런 문장을 초당 수십 개씩 찍어낸다. 매끄럽고, 옳고, 텅 비어 있다.

결론을 정반대로 뒤집어 아무도 진지하게 주장하지 않는다면 원래 결론의 정보량은 0이다. '좋은 관리자는 사람을 잘 돌보는 사람이다'를 뒤집으면 반박조차 성립하지 않는, 맞지만 아무 말도 아닌 문장이 된다.
결론을 뒤집는 정보량 테스트

이 테스트를 통과하는 데는 문장력이 한 톨도 필요 없다. 필요한 건 단 하나, 내 결론이 논쟁의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아는 판단이다. 그리고 이 판단은 AI에게 넘기는 순간 증발한다. AI는 양쪽 편을 똑같이 매끄럽게 써주기 때문이다. 어느 편에 설지는, 끝내 사람이 정해야 한다.

창을 닫는 연습

AI를 켜는 순간은 맨 마지막이어야 한다. 종이에 결론 한 문장을 먼저 쓰고 정반대로 뒤집어 본 뒤, 진지하게 주장할 사람이 없으면 창을 닫고, 판단이 서면 그때 AI를 켠다. 문장은 그때 사와도 늦지 않다.
AI는 맨 마지막에 켠다

다시 챗봇 입력창 앞이다. 이번엔 주제를 붙여넣기 전에, 종이 위에 결론 한 문장을 먼저 쓴다. 그리고 뒤집어 본다. 뒤집은 문장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으면, 창을 닫는다. 아직 쓸 게 없다는 뜻이니까.

AI를 켜는 순간은 맨 마지막이어야 한다. 문장이야 그때 사와도 늦지 않다. 다만 그 문장이 실어 나를 판단은, 켜기 전에 이미 서 있어야 한다. 그레이엄이 그은 선 위에서 어느 쪽에 설지 정하는 일 — 그건 여전히, 오직, 창을 켜기 전의 당신 몫이다.

출처 · 참고

참고 문헌

이미지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