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맞대면 낫다"는 믿음
회의실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화이트보드 앞에서 아이디어를 마구 쏟아내는 장면. 이제는 창의적인 조직을 상징하는 그림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말하고, 남의 생각에 슬쩍 올라타고, 비판은 잠시 접어 두는 것. 우리는 이렇게 해야 혼자서는 닿지 못할 더 좋은 답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창의성에 관한 통념을 여섯 나라 일반인에게 물은 2021년 조사에서, 응답자의 80%가 "여럿이 모여 브레인스토밍을 하면 혼자 생각할 때보다 아이디어가 더 많이 나온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뒤에 붙은 한 줄입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는 것이죠(Inc., 10 Myths About Creativity).
믿음은 이토록 단단한데, 증거는 왜 이렇게 헐거울까요.
증거가 말하는 브레인스토밍의 한계
사실 집단 브레인스토밍을 향한 의심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테일러 연구진이 1958년에 처음 보고한 이래, 반세기 넘게 쌓여 온 연구들이 대체로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거든요. 같은 인원이라도, 각자 따로 아이디어를 낸 다음 그것을 한데 모았을 때(이걸 '명목집단'이라고 부릅니다) 한 방에 모여 함께 떠든 집단보다 더 많고 더 나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1991년 멀런 연구진의 메타분석 역시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왜 이런 뒤집힌 결과가 나올까요. 흔히 꼽히는 원인은 몇 가지로 정리됩니다.
- 생산성 차단: 한 번에 한 사람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방금 떠올랐던 생각이 흐릿해지거나 아예 사라져 버립니다.
- 평가에 대한 두려움: 아무리 "비판 금지"를 외쳐도 소용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리석어 보일까 봐,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을 스스로 삼켜 버리거든요.
- 무임승차와 눈치 보기: 누군가는 남의 아이디어에 슬쩍 묻어가고, 집단은 어느새 먼저 나온 그럴듯한 방향으로 몰려갑니다.
디엘과 슈트뢰베가 1987년에 이 세 가지를 하나씩 실험으로 갈라 본 결과, 그중 '생산성 차단'이 손실의 가장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결국 문제는 '함께'가 아니라, 함께 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소리 내어, 실시간으로, 경쟁하듯 말하는 구조 그 자체가 각자의 생각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죠.
더 깊은 질문: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게 답일까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볼까요. 브레인스토밍이 딛고 선 전제는 이렇습니다. "일단 많이 쏟아내다 보면 그중에 좋은 게 하나쯤 있다." 브레인스토밍을 대중화한 오스본이 1953년 『응용 상상력』에서 내세운, 양이 결국 질을 데려온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다루는 문제 자체가 까다롭고 구조가 복잡할 때는, 무작위로 많이 던지는 방식이 오히려 힘을 잃습니다.
창의적 문제해결 이론인 TRIZ를 소개하는 한 자료는 바로 이 지점을 날카롭게 찌릅니다.
"브레인스토밍과 같은 무작위적 방법들은 인간의 인지능력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결과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다."
— 창조적 문제해결 이론 TRIZ 소개, 고려대학교
여기서 눈여겨볼 말은 '무작위성'과 '인지능력 의존', 이 두 가지입니다. 브레인스토밍은 결과를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의 경험과, 그 순간의 반짝임에 맡깁니다. 운이 좋으면 좋은 답이 나오고, 아니면 그저 그런 답이 나오죠.
반면 TRIZ 같은 접근은 다릅니다. TRIZ는 특허에서 되풀이되는 해결 원리를 정리해 두고, 문제가 품은 모순의 구조를 먼저 또렷이 정의합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에 맞는 해결 방향을 차근차근 좁혀 갑니다. 자유롭게 흩뿌리는 대신, 잘 정의된 문제와 이미 검증된 패턴에 기대는 것이죠.
그래서, 모이지 말라는 뜻일까
아닙니다. 함께 일하기를 그만두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모임'이 가진 힘을 제대로 써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당장 실무에서 시도해 볼 만한 것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먼저 혼자, 그다음에 함께. 회의 전에 각자 조용히 아이디어를 적게 하세요(이걸 '브레인라이팅'이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모여서 그것을 다듬고 엮으면 됩니다. 발산은 개인이, 수렴은 집단이 맡는 분업이죠.
- 문제를 정의하는 데 시간을 쓰세요. "좋은 아이디어 없나요?"라고 묻는 대신, "지금 무엇과 무엇이 부딪치고 있는가"를 먼저 규정해 보세요. 그러면 논의의 과녁이 또렷해집니다.
- 양이 아니라 구조를 목표로. 아이디어 개수를 세지 마세요. 그보다는 검증된 패턴이나 체크리스트로 해결의 공간을 훑는 편이 훨씬 안정적입니다.
- 판단할 시간을 따로 떼어 두세요. 발산과 평가를 한자리에서 섞지 마세요. 나온 아이디어를 냉정하게 걸러 낼 별도의 단계를 두는 겁니다.
마치며
80%가 믿지만 근거는 빈약한 명제. 브레인스토밍을 둘러싼 이 간극은 우리에게 하나의 태도를 요구합니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관성 대신, "이 방식이 정말 더 좋은 답을 주는가"를 물어보는 태도 말입니다.
여럿이 모여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일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창의성의 유일한, 혹은 최선의 방법이라는 믿음만큼은 한 번쯤 의심해 볼 만합니다. 다음 회의에서 화이트보드를 켜기 전에, 먼저 던질 질문은 하나입니다. 지금 무엇과 무엇이 부딪치고 있는가.
출처 · 참고
참고 문헌
- Christina Desmarais (2013). Busted: 10 Myths About Creativity. https://www.inc.com/christina-desmarais/10-myths-about-creativity.html
- Benedek, M. 외 (2021). Creativity myths: Prevalence and correlates of misconceptions on creativity.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191886921004451
- Taylor, D. W., Berry, P. C., & Block, C. H. (1958). Does Group Participation When Using Brainstorming Facilitate or Inhibit Creative Thinking? https://www.jstor.org/stable/2390603
- Diehl, M., & Stroebe, W. (1987). Productivity Loss in Brainstorming Groups: Toward the Solution of a Riddle. https://homepages.se.edu/cvonbergen/files/2013/01/Productivity-Loss-In-Brainstorming_Toward-the-Solution-of-a-Riddle.pdf
- Mullen, B., Johnson, C., & Salas, E. (1991). Productivity Loss in Brainstorming Groups: A Meta-Analytic Integration. https://dynamic.decorrespondent.nl/downloads/michiel-de-hoog/Mullen-1991-Productivity-Loss-in-Brainstorming-Groups.pdf
- Osborn, A. F. (1953). Applied Imagination: Principles and Procedures of Creative Problem-Solving. https://en.wikipedia.org/wiki/Brainstorming
- TRIZ 소개, 고려대학교. http://oxygen.korea.ac.kr/index.files/policy/policyref/alletc/TRIZ.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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